2019년의 새해가 떴다. 모든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권리가 있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지만, 도통한 수행자들의 행복에 대한 일반론은 “인간의 행복은 가벼운 마음과 부드러운 몸놀림, 그리고 생각의 고요함에 있다.”라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내면을 탐구해가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이 섹스에서 느끼는 쾌감이상이기 때문에 세속을 떠나서 정진 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수행의 길에 고통만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수행자들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명상과 기도를 할 때 옥시토신이 분비 되는데, 이 호르몬은 사람과 유대, 신뢰와 관용, 안정감과 평정심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옥시토신은 이성과 섹스를 할 때도 분비 된다. 사랑과 명상을 통해 분비되는 호르몬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상대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함께한 섹스는 만족과 충족을 주기 때문에 깊은 이완을 느끼게 된다. 이 이완의 에너지가 사랑의 에너지이며 인간의 내면을 풍요하게 한다. 바로 여기에서 사랑과 명상의 길이 하나로 만난다. 그러므로 사랑의 길과 명상의 길은 의식의 변화를 초래하고, 그 변화는 모든 문제의 원인과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통찰 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깨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진실과 이해 그리고 사랑의 대화라는 점을 간과한 결과일 것이다. 결혼의 조건으로 허리 아래 말초적 자극의 도구만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경제조건만을 우선시 한 선택 때문이다. 그런 사랑은 허리 아래는 만족 할 수 있겠지만, 가슴의 교감은 기대 할 수 없다. 인간의 성행위는 동물과 다른 점은 육체의 행위를 넘어선 그 이상의 교감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지지자들을 설득하고 결집 시키는데도 진정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진실이 있어야 한다. 위선과 거짓일 경우 지지층은 배신감을 느끼면서 쉽게 돌아선다. 그렇게 돌아선 사랑은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청년은 저항과 분노의 에너지로 들끓어야만 한다.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지구가 우주를 운행 하듯이 물리적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어 파워가 나온다. 청년은 저항과 분노의 에너지가 넘쳐나야만 발전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극과 극은 통하듯이, 깊은 분노와 사랑은 공존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랑도 진실한 대화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청년에게 일일이 자리를 깔아 주고 구직수당 등 알량한 몇 푼으로 달랠 일이 아니다. 그런 방식은 청년을 병들게 할 뿐이다. 생태계 교란 행위일 뿐이다. 미국 캐나다나 유럽에서는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다 걸리면 큰 벌금을 맞는다. 생태계 파괴 행위이기 때문이다. 청년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보호 한다는 명분으로 주는 각종 혜택이 결국에는 부메랑이 되어 평생 남에게 의존하는 삶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과보호를 받는 청년은 연인과의 대화에서도 관계가 깨질까봐 전전긍긍한다.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대화가 유지 될 수 없고 그런 사랑은 오래 갈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알도록 해야 한다.
비지니스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법과 규율이 없는 사회는 결코 유지 될 수 없고 번영 할 수도 없다.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독백은 해양교통국가인 그리스와 지중해벨트의 번영을 나았다. 법이 지켜지는 사회는 예측 가능한 사회다. 사람 사는 일에는 예측이 가능해야 한다. 특히 비즈니스 세계가 그렇다. 최근 월가 사람들이 롤러코스터 멀미에 걸린 이유는 트럼프의 좌충우돌 때문이다. 시진핑의 중국 정권이 불안해 보이는 것도 법의 경계를 넘어서는 정적제거와 부정부패척결에 있다.
광주형 일자리가 노조의 반대로 표류하고 있는 반면 노조 없는 기업집단으로 수십년간 비난을 받아 온 삼성이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실에서 시사점이 분명하다. 아이가 떼를 써도 나이가 들어가면 집안 형편 보면서 써야 사랑 받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착과 사랑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대에게 공간을 허락하지 않고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면서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성을 향한 성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섹스의 횟수가 상대에 대한 사랑과 비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 존재에 대한 각성 및 이해와 깊이에 비례한다. 생식기에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섹스는 어떤 이성과도 가능하지만 사랑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여성을 성적도구로만 보는 남성에 대한 절망과 분노에 떠는 여성들이 행복할 수 없듯이 노동자들은 자신을 노동착취의 도구로만 보는 기업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업을 선택한 것은 본인 자신이다. 결과적으로 본인에게 책임이 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사람 사는 방법이다.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는 부패 기업에게 제 몫을 더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태도는 스스로를 창부로 전락시키는 꼴이다. 창부의 섹스가 행복할 리가 없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부러워한 지 약 500년 뒤 영국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중국이 산업혁명에 진입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춘 이유를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중국이 500년 전에는 대단히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후 흐름을 지속시키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는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과 그렇지 못한 중국의 차이를 이렇게 비교했습니다.
“중국은 사법정책의 집행에서 공정성과 일관성을 상실한 결과, 성장 잠재력을 잃고 정체되고 말았다. 국민들이 재산의 소유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어떠한 국가에서도, 계약이 법률에 의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어떠한 국가에서도, 지불할 능력을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채무를 변제하도록 강제할 수 없는 어떠한 국가에서도 상업과 제조업이 장기적으로 번성한다는 일은 거의 발생할 수 없다.”
“영국에서 선진적으로 상업의 자유와 형평성 있는 사법 집행 제도가 정착됨으로써 경제적 측면에서 경제 주체들에 의한 근면과 생산적 자원개발 노력을 자극할 수 있었으며, 이 점이 유럽국가 중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의 토대로 작용했다.”
"이는 수 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진단으로 평가받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유성운의 역사정치] 산업혁명 500년 전 영국보다 잘 살았던 송나라는 왜 망했나
https://news.joins.com/article/23257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