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정담(孤島情談)…(9)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미얀마에 들어온 지도 만 8년이 가깝습니다.
황금손은 외골수 기질이 있어서 어떤 일을 하겠다고 다짐을 하면 끝장을 보는 별난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해죽순도 7,000만 년 이상 바닷가 갯벌에서 지진이나 해일은 물론이고 빙하기 등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지구를 지켜왔지만 어느 누구 한 사람 그것이 폴리페놀과 미네랄, 비타민 등을 듬뿍 담고있는 보물(寶物)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 인류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귀한 용도로 부각
그랬기에 오지의 주민들에게 지붕을 덮는 이엉이나 불쏘시개 등 하찮은 용도에만 쓰임받던 해죽순이었는데 어느 날 오지의 섬을 찾아간 황금손의 눈에 띄임으로써 비로소 인류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귀한 용도로 부각된 것입니다.
양곤에서도 약 700여 km나 떨어진 오지 중에서도 오지인 외딴 섬에서 생활하면서도 건강을 유지하고 삶에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곳의 환경이 너무나 탁월한 까닭입니다.
이곳의 식습관이나 식재료가 한국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탓에 황금손이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몇 가지 필수 식재료는 가지고 옵니다.
된장과 고추장, 고춧가루, 고추냉이(와사비), 식초 등이 그 부류들입니다.
어제 저녁에는 특별메뉴로 식사를 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숯으로 불을 피워 우선 밥을 짓고, 된장을 넉넉히 풀은 냄비에 이웃에서 준 부상당한 소프트크랩을 듬뿍 넣은 후 양념을 가미하여 끓였습니다.
소프트크랩이란 것이 무슨 대단한 상품이 아니고 말 그대로 “부드러운 게”를 뜻하는데 허물을 갓 벗은 녀석들입니다.
겉 껍질이 말랑말랑하여 조리를 했을 때 껍질 째 그냥 먹을 수 있는데 칼슘 등 영양도 많지만 맛도 특별합니다.
황금손이 사는 섬, 특히 해죽순이 자라는 갯벌에는 머드크랩이라 부르는 게가 많이 서식하고 있고 바로 이 게가 성장 단계에서 허물을 벗은 후 약 6시간 동안은 말랑말랑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이 때 포획한 게를 “소프트크랩”이라 부릅니다.
이 게는 보통 게보다 약간 비싸지만 껍질이 부드러워 포획 과정에서 자칫 다리가 떨어져나가는 등 상처를 입기가 쉽습니다.
상처를 입은 게는 상품가치가 없어지기에 동네 주민들이 가끔 황금손에게 한 사발 씩 선물로 갖다주는 것입니다.
이 소프트크랩으로 요리를 하면 게의 색상이 빨갛게 변합니다.
맛도 좋지만 색상도 입맛을 돋우는 까닭에 소프트크랩 된장국이 있는 날은 포식을 하게 됩니다.
더우기 어제 저녁은 이웃 섬에서 우리 공장에 해죽순을 채취해서 공급하는 분이 자기가 길렀다며 오이 10여 개를 가지고 왔더랬습니다.
모양은 한국의 비닐하우스에서 기른 매끈한 오이에 비할 수가 없이 자유롭게 생겼지만 맛은 상큼하고 좋았습니다.
이 오이를 물에 씻어서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서걱서걱 썰어 소금에 한 동안 절였다가 헹군 후 고춧가루, 식초, 토디팜재거리(설탕 대신에 넣는 천연 감미료)와 양파, 마늘 등을 넣고 무침을 만들었습니다.
소프트크랩 된장국, 자연에서 기른 오이무침, 그리고 섬마을 주민들이 방목으로 기른 닭이 낳은 친환경 계란 두 개를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조리한 계란 프라이까지 준비를 했으니 오늘은 모처럼 밥상이 푸짐했습니다.
섬에 살다보니 운동량이 많은 관계로 식사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허기가 느껴집니다.
자동차가 없는 섬에서는 하지않으려 해도 운동량은 차고 넘칩니다.
배가 고프니 상에 오른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계란 프라이 두 개를 후딱 입 안에 털어 넣었습니다.
8년 동안 황금손을 곁에서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동지(Done Gyi) 군이 눈치를 채고는 다른 직원에게 계란 프라이를 더 만들어 오라고 시킨 것 같았습니다.
잠시 후에 두 개의 계란 프라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접시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습니다.
계란 프라이를 먹어보니 식초가 들어갔는지 강한 신맛이 났습니다.
10여 m 떨어진 부엌으로 가서 확인해 보았습니다.
식용유는 투명한 병에 노란 콩기름이 담겨있고 한국에서 가져온 오뚜기 2배식초 역시 비슷한 모양의 병에 담겼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색상이 거의 같습니다.
한글을 알 턱이 없는 그 직원이 식초를 식용유로 잘못알고 미얀마산 식용유 대신 2배 식초를 듬뿍 넣고 계란을 프라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프라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방금 전에 프라이를 할 때 사용했던 기름이 조금 남아있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2배 식초로 프라이한 계란은 그 맛이 참 묘했습니다.
동지 군과 식초를 넣고 프라이를 한 “땅애” 군 등 직원들은 밥을 먹다가 한 동안 배꼽을 쥐어야 했습니다.
어제 저녁에 있었던 해프닝이지만 섬에서는 이런 일들조차도 큰 즐거움입니다.
이곳에서는 실내에서 작은 도마뱀들도 자주 발견됩니다.
마치 알비뇨 증상이 있는 동물처럼 몸 전체가 약간 분홍색으로 투명해 보이는 듯합니다.
이 도마뱀은 벽이나 천장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면서 밤에 인간들의 피를 뽑으며 괴롭히던 모기같은 곤충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먹습니다.
사계절이 더운 나라에서 모기나 파리가 그나마 적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 도마뱀의 눈부신 활약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다가 한국에서 오신 손님들은 방 안에 나타난 이 도마뱀을 보면 기겁을 하기도 하지요.
세파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이 사는 곳…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황금손은 이미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작은 즐거움들이 여럿 합쳐지면 그것이 행복이 되고 그 행복이 이어지니 건강은 절로 찾아듭니다.
차가 없으니 걸어서 섬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사이에 태양은 서산을 향합니다.
아직은 달 초여서 초저녁에 잠시 떴던 조각달은 사라졌고 새벽의 맑은 하늘엔 초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그 수많은 별자리들이 온전히 알몸을 드러낸 채 몸매를 뽐내고 있습니다.
누워서 별자리를 감상하는 것 역시 “행복”의 범주에 속합니다.
오지의 섬에서 지내는 중에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불편을 긍정으로 소화해내는 힘을 기르게 된 점입니다.
긍정(肯定)이야말로 행복의 원천(源泉)입니다.
고도정담 그 아홉 번째 이야기는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춘분을 지난 음력 2월 초 여샛날 새벽도 황금손이 먼저 깨우겠습니다.
미얀마에서 객원논설위원 배대열 / mansonma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