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의 외교철학은 오로지 ‘부국강병’이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國賓) 방문 중에 이런저런 말들이 나돌고 있다. 중국 경호원의 한국 기자 집단 폭행,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결례, 국빈 만찬 내용 비공개 등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전개되는 가운데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알려지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한다.

그 이야기는 3박 4일 방중 기간 열 끼 식사 중 중국 쪽 인사와 식사한 건 국빈 만찬과 16일 충칭시 당서기와의 오찬 단 두 끼뿐이라는 것이다. 먹는 문제에 대해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는 중국사람 성향을 볼 때 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생겼는지 이해가 될듯하다.

전통적인 중국의 외교정책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의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멀리 떨어진 나라와는 동맹을 맺고 이웃한 나라를 치는 계책이다. 따지고 보면 한반도를 처음 통일한 신라의 외교정책도 백제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여 그 힘을 빌린 것도 ‘원교근공’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의문은 간단하게 풀린다. 중국은 우리를 인접한 나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태평양 건너에 있는 미국은 멀리 있으므로 친교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방중 첫날 자금성을 통째로 비워 시진핑 주석과 만찬을 함께하고 다음 날에는 국빈만찬을 하는 등 환대하였던 것이다.

이쯤에서 혹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북한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나라다. 그런데 중국은 왜 북한을 싸고 도는 것인가 ?”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북한에게는 ‘원교근공’이라는 잣대가 아닌 입술이 없으면 잇몸이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답을 듣게 되면 질문한 사람은 발끈 하면서 ”중국 같은 대국의 외교정책에 원칙이 없다고?“ 라고 질문할 것이고 그에 대한 답변은 더욱 간단하다. 외교는 힘 있는 자의 논리가 적용 될 뿐 원칙은 허상이라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00년 무렵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말한다. 이 500여 년 동안 수많은 제후들이 살아남기 위해 온갖 계략을 짜내던 시대였다. 자전거가 정지하면 쓰러지듯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바퀴의 페달을 끊임없이 밟아야 했던 것이다. 군주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도 예외 일수 없다. 용도가 폐기 되어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온갖 인물의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그 와중에 수많은 고사성어가 탄생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고사성어의 대부분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고사성어는 외교적 수사에 접목이 가능한데, 궁극적으로는 힘의 논리에 좌우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힘이 없어도 우리는 중국을 이길 수 있다. 그것은 역사가 말한다. 베트남은 중국 남쪽 끝에 붙어 있는 나라다. 베트남도 당연히 ‘원교근공’ 대상이다.

1979년 2월 17일 중국은 베트남을 침공하여 밀림에서 고전 끝에 가까스로 3월 6일에 랑선을 점령하고는 일방적으로 “징벌적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철군한다”고 발표하고 철군하였다. 당시 베트남군의 주력이 캄보디아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과 맞선 병력은 국경수비대와 민병대뿐이었는데도 고전하던  중국군은 전쟁 중 많은 사상자를 내는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철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캄보디아에서 중국을 철군시키고 시아누크 공을 복위하려던 당초의 목표를 전혀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유비가 세상을 떠난 뒤 현재의 베트남인 남만왕(南蠻王) 맹획(孟獲)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촉나라의 남부 변경을 침범했다. 제갈량은 직접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맹획을 생포했다. 제갈량의 계략에 걸려들어 생포된 맹획은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제갈량은 오랑캐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풀어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맹획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자신의 지략을 이용하여 맹획을 다시 사로잡았지만 또 풀어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일곱 번 만에 마침내 제갈량은 맹획과 화해하고 철군을 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다.

중국은 그들에게 코브라처럼 목을 들고 덤비는 이웃에게는 차마 ‘원교근공’의 논리를 적용하지 못하는 종이호랑이이다. 그렇다고 중국과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이다. 떳떳한 명분과 교활한 술책으로 실리잡기를 하는 것이다. 순진하게 속내를 드러내다가는 검찰구형보다 더 많은 형을 받은 사람처럼 세인의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국가 경영을 책임지는 정부에게 국민이 바라는 것은 오직 ‘부국강병’이다. 삼강오륜은 국민 개개인이 알아서 할 문제다. 정부가 그런 도덕성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정부는 오로지 국가의 백년대계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그 수단이 비록 저급하고, 음모로 점철된 마키아벨리즘이라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2,700년 전의 백가쟁명시대보다 더 엄혹한 현실 속에 있다.국가가 없어지고 난 다음에는 정부도 국민도 없기 때문이다.

 

송근석 / shark@goodmonday.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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