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

“당신이 가족을 사랑한다면, 아이들 면전에서 와이프에게 큰소리 하면 안 된다. 당신의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남편의 등 뒤에서 콧등을 씰룩거려서도 안 된다.”

모든 책임은 가장이 진다. 그러나 가장은 누구 때문에 되었는가 ? 가장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대통령도 되고 싶다고 혼자 될 수 없다.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든 게 가장만의 책임일까 ?

모든 사건마다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

장관은 왜 있고, 소방서장은 왜 있을까 ?

부인은 왜 있고, 집안에 어른은 가장 뿐인가 ?

대통령이 만만하면 공직은 무너지고, 가장을 허접하게 보면 집안은 무너지고 종국에는 ‘제 눈 제가 찌르기’다. 화재현장에서 남의 생명을 위하여 본능적으로 자기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소방관의 모습을 잊어는 안된다.

우리는 “실패에서 배우기”를 반복 한다. 역사가 그러했다. 오늘 날의 민주주의는 수 백 년도 훨씬 넘는 실패 속에서 얻은 ‘최적’ 치이다. ‘최적’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 중) 가장 알맞은 그 무엇이다.” ‘최적’이 유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류는 실패를 거듭하면서 ‘최적의 선택’을 해 왔고 오늘날의 문명을 꽃피웠다.

‘최적의 선택’은 철학일수도, 체제일수도, 종교일수도, 불륜일수도, 의무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하나 변치 않는 것은 그 속에 ‘사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사람’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행태야 말로 ‘적폐’일 수 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희생된 고인들의 넋을 진정으로 위로 한다면, 책임 공방은 잠시 미뤄두고 조용하게 고인들의 넋을 위로할 시간을 가져 보자는 제언을 올리는 바이다.

 

 

송근석 기자 / shark@goodmonday.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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