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에서

지난 27일(목) 오후 인천공항 출국장으로 향하던 필자는 에어캐나다 탑승 수속 카운터가 어디쯤인지 알고 싶어 인천공사 안내 전화인 1577-2600로 전화를 했다. 인천공항청사는 워낙 넓어 잘 못 내리면 카트를 끌고 한참을 이동해야하기 때문이다. 신호가 가자 젊은 여성의 나지막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아래와 같이 나왔다.

“오늘이 행복한 건 대화가 아름다운 당신 때문입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고객응대근로자 보호조치가 시행 중입니다.

고객응대근로자에게 폭언폭행을 하지 말아 주세요.

통화연결 후 상담 내용이 녹음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소위 ‘갑질’이 문제라더니, 전화를 건 사람이 응대하는 근로자에게 공손히 하지 않으면, 법에 의해서 처벌 받게 될 것이고, 증거로 삼기 위해 통화내용을 녹음한다는 이야기다.

지난 주 모 국회의원이 공항에서 갑질이 문제되어 결국 사과를 하고, 소속 상임위에서 퇴출 됐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어디 가서 갑질을 할 만큼 권력도, 돈도,  그 흔한 줄도 없는 필자로서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짧은 학습효과 때문인지 이윽고 연결된 통화에서는 잔뜩 주눅이 들어 간신히 용건만 묻고 끊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무튼 목적을 이루었다고 스스로를 위로 했다. 하마터면 늘 가던 K열로 갈 것을 E열로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항용 이런 전화 첫 문장에는 “고객을 응대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말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 속 주인공은 그런 말은 쏙 빼고 불문곡직하고 상대방인 고객에게 일방적인 경계와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반작용으로 뭔가 확실한 것을 믿고 붙잡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고치기보다는 자신의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증거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사람들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함축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우선 “오늘이 행복한 건 대화가 아름다운 당신 때문입니다.”라는 첫 문장부터 어안이 벙벙해진다. 무슨 말인가 ? 전화기 너머 여성은 분명 고객만 대화를 아름답게 하면 오늘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행복한 게 어디 전화 대화뿐일까라는 의문마저 든다.  그러면서 말을 아름답게 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고객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객은 아직 입도 벙긋하지도 않았는데, 선제적으로 방호벽을 치고 나온 것이다. 이런 행동은 앞으로 있을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자세다.

두 번째 문장 “산업안전보건법에 고객응대근로자 보호조치가 시행 중입니다.”은 법이라는 권위를 앞세워 자신을 보호하는 비겁함이 묻어 나는  대목이다. 법은 입법 취지에 충실하고, 사건의 전후사정을 고려하는 합리와 정의가 개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차하면 문제 삼겠다는 취지로 어설프게 법을 들먹인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법관 신상털기를 생각하면, 법보다 집단 감정이 더 무섭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세 번째 “고객응대근로자에게 폭언폭행을 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고객이 이런 말을 왜 일방적으로 들어야만 하는지 불쾌한 감정이 든다. 이런 말은 통화 중에 실제로 폭언으로 폭행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과는 통화를 일방적으로 중지하고 준비된 멘트를 듣게 한 후 다시 통화를 계속하는 방법이다. 그래야만 관련법의 취지와 본질에도 맞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차별적으로 전화한 모든 고객에게 적용하는 것은  막무가내 내로남불 식이다.

네 번째로는 “통화연결 후 상담 내용이 녹음됩니다.”라는 부분에서 뒤를 조심해야겠다는 불안감이 부지불식간에 엄습한다. 평소 일거수일투족이 수많은 CCTV로부터 감시당하고 있는 일상에서는 오히려 보호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안정감을 느껴왔던 필자이지만, 보이지 않는 상대방을 통화 녹음으로 감시한다는 노골적인 멘트에는 “그래 ? 너희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라는 반항심이 생긴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 자신은 규범과 질서를 충실히 잘 지키고 정해진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아무런 과오도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한 민원인에게 논란의 빌미를 줄 기회조차 주지 않는 사람임을 강조하여 자신을 보호한다. 너무나도 완벽한 이 사람 자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가득한 전제로 모든 문제의 책임은 상대방에 있음을 상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방어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후사정을 따져 보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몫이 있을 수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이라는 권위를 앞세워 모든 문제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리고 전화 통화 내용이 녹음되고 있음을 알려 줌으로써 고객의 결점과 비밀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된 삶이 존재 할 수 없다. 그것은 죽은 자의 삶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온갖 힘을 쓰지만 자기 자신과 소유물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영생할 것처럼 살려 하다가 허망하게 죽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깨어나 있을 때 집착을 벗어난 사람의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인생은 어려운 법이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고,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것이 또 인생이라는 점을 깊이 통찰해야만 두려움에서 벗어난 삶을 구가 할 수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 폭언과 폭행이 난무하고 있는 이유로 노동자의 권익보호를 위한 이런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인천공항공사는 대한민국의 관문을 지키는 얼굴이다. 필자는 한 편으로 알량한 애국심의 소산에서인지, 영어나 중국어, 일본어로도 이런 안내멘트가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있다면 즉시 시정해야 할 것이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는 없다면 그것은 자국민에 대한 명백한 차별 행위다.  외국인이라고 고객응대근로자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외국인들도 알아들을 수 있고 법을 준수하도록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다만 보다 스마트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시정해야 할 것이다.

근로자가 보호 받아야 하는 만큼 자국의 고객들도 폭언을 일삼는 사람으로 오해 받고 무차별적으로 취급 받지 않을 권리가 당연히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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