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화사 이야기 9. 현대미술

<사진 : 행복한 눈물 / 로이 릭턴쉬타인 작품 / 인쇄물처럼 보이기 위해 망점 하나하나를 직접 손으로 한 점씩 찍어서 제작했다>

지난 호에서 인상주의 화가 마네의 ‘올랭피아’이야기를 했다. ‘올랭피아’가 사람들에게 뭔가 충격을 준 이유는 그림 속 벌거벗은 여자가 거만하게 관객을 감히 노려본다는 것이다.

이전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마치 관람자가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처럼 그려졌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광고 속 모델이 광고를 보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 보는 사람은 불안할 것이다. 보는 사람 보기 좋게 그려진 그림은 한마디로 비위를 맞춰주려고 그린 그림이다. 그래서 등장인물은 정면을 노려보도록 그리지 않는다. 화면 밖 먼 곳을 보거나, 화면 속 다른 사람과 눈길을 주고받거나 하는 모습니다. 부득이 관객을 바라보도록 그려졌으면 ‘모나리자’처럼 상냥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그려진다.

 

♦ 작가들의 주체적 사상을 작품에 담기 시작

그런데 ‘올랭피아’는 이제까지 그림 속의 주인공들에게 주어졌던 연극성을 제거한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비로소 자기 주체적인 사상을 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조가 발전적으로 이어지면서 평면의 2차원 공간에 보이지 않는 반대편을 묘사한 ‘파블로 피카소’는 ‘입체파’ (Cubism)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칸딘스키’는 색의 구성, 선의 변화 또는 빈공간의 이용 등 순수한 이론을 바탕으로 했는데, ‘추상파'(Abstractionism)의 효시가 된다.

‘살바도르 달리’는 다리가 여섯 개인 사람, 코가 둘인 사람, 시계가 가죽처럼 책상에 늘어진 모습 등을 그렸는데 이를 ‘초현실주의'(Surrealism)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낭만주의 이후에는 “무슨 시대”라는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행과 트렌드의 기간도 짧고 변화무쌍하며, 그 사조의 발생 이후 오늘날까지도 작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므로 현세를 사는 우리들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문화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 문화적으로 변방에 있던 미국에서 새로운 사조의 출현

그 중에 하나의 쇼킹한 사조가 있다. 문화적으로 변방에 있던 미국에서 나온 사건으로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앤디 워홀’이다. 워홀은 기름종이 위에 잉크로 그림을 그린 후에 이를 다른 종이로 찍어내는 블로팅 기법을 사용하여 삽화를 그렸는데, 이 방법은 종이의 흡수 정도에 따라 선이 번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여 자연스럽게 선이 표현 됐다. 이 기법은 의외로 매력적이어서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선호하는 광고주들이 늘어나서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워홀이 눈을 뜬 것이 실크스크린 기법이다. 실크스크린은 일종의 판화기법으로 문양별로 나눠 뜬 판형에 따라 정해진 물감을 부어 완성시킨다. 이 방법으로 워홀은 색깔만 달리하는 시리즈 작품을 많이 제작할 수 있었다. 캠벨사의 수프캔, 달러 지폐,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의 이미지를 반복 나열함으로써 기존의 회화 방식에서 나타나는 화가 개인의 개성과 해석을 제거하고 냉담하고 무감각한 상태를 나타내려고 시도 했다.

1963년,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차리고 팩토리 Factory라고 불렀다. 그는 이곳에서 공산품을 생산하듯이 작품을 대량 제작했고 이를 위해 조수들을 고용했다. 조수들이 실크스크린을 완성하면 자신은 서명만 하는 식이었다. “예술과 예술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매우 급진적인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는 매우 상업적이었다.

 

♦ “사업을 잘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예술이다.”라는 말도 그의 말이다.

1969년 잡지 인터뷰를 창간했다. 잡지는 유명인사의 사진으로 표지를 장식하고 인터뷰를 게재 하는 형식이었다. 인터뷰 내용을 거의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싣는 것이 특징이었다. 인터뷰를 통해서 워홀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믹제거, 라이자 미넬리 등 당대 최고 유명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홍보를 위해서 길거리에서 잡지를 무료로 나눠주기도 하면서 또 다는 인터뷰 대상을 끌어들였다.

인터뷰의 표지모델을 했던 유명 인사들이 이제는 워홀에게 찾아와 초상화를 의뢰해 왔는데, 그들의 얼굴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찍은 후 고객의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실크스크린으로 초상화를 만들었다. 이 때 그는 영악하게도 한 장이 아니라 항상 4장을 만들었다. 작품이 완성되면 의뢰인에게 전화를 해 스튜디오로 불렀다. 의뢰인은 4장 다 좋기 때문에 어떤 걸 골라야 할지 결정 못하고 있을 때 워홀은

“한 장만 구입하면 25,000불인데 4장 구입하면 4만 불에 주겠다.”고 제안했고 그 제안은 대부분 받아 들여졌다고 한다.

♦ 앤디 워홀의 새로운 사조는 “팝아트 (Popular Art)”라고 불려진다.

그의 문화사적 공헌은 우리의 일상생활, 소비문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기호를 인식하고 변형시켜서 낯선 것, 뭔가 다른 것으로 만드는 예술이다. 익숙해져 있는 대중문화에서 이미지를 선택해 그 속물적이고 진부한 속성을 드러내는 시도로써 이때부터 예술은 더 이상 순수함을 고집하지 않고 소비문화에 중독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삶에 들어오게 되었다.

‘로이 릭턴쉬타인’도 ‘팝아트’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릭턴쉬타인은 특히 만화라는 장르가 가진 평면성에 주목하였다. 굵은 윤곽선과 빨강 파랑 노랑 등 원래 만화보다도 더 단순한 색상으로 당시 유행하던 세속적인 만화 정면을 사용하여 누구나 그 내용을 단번에 알 수 있게 하면서 평면위에 그린 도안의 윤곽선 안쪽에 인쇄망점을 채워 입체감을 표현한다. 이 망점은 19세기 신문 인쇄술이 개발 되면서 등장한 벤데이 도트 Benday dot라는 것으로 이 망점의 분포를 이용하면 평면에서도 삼차원 입체를 효과적으로 구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앤디 워홀의 말처럼 현대 예술은 유난히 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 전의 예술도 언제나 자본과 가까이 있어 왔다. 교회, 귀족 그리고 브루조아지 등으로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 권력과 자본이 몰린 미국으로 건너 왔던 것이다.

 

♦ 예술은 언제나 인류가 만들어 내는 역사에 반응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본은 냉정하며 언제든지 배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이고 예술은 언제나 인류가 만들어 내는 역사에 반응하며 함께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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