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로크 ( Baroque ) 시대 : 종교예술로의 회귀
교회의 강력한 통제를 벗어나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그리스 로마시대로의 회귀라는 복고풍 휴머니즘이 트렌드였던 르네상스시대는 오래 가지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중세 유럽의 왕들이 영토 확장과 각종 이권개입을 위해서는 교회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는데, 교회를 신성시 하지 않고 인간화 하는 르네상스 풍조 아래서는 교회의 협조를 얻기 어려웠던 것이다. 통치자들의 이러한 생각은 교회의 요구와도 합치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로크시대 사조의 특징은 왕과 교회가 손을 잡고, 화가들은 엄숙한 성화를 그리는데 다시 몰두 하는 한편 인간적인 작품은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그쳤다. 또한 음악가들은 교회에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음악을 작곡 하였으며, 건축가는 신을 찬미하는 엄숙한 교회를 건축하는 한편으로 왕의 화려한 궁전을 건축 하였다. 오늘날 사치와 화려함의 극치를 상징하는 ‘바로크풍’이라는 말은 이러한 이유로 연유된 것이며,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그 중심이었다고 이해 할 수 있다.
♦ 로코코 ( Rococo ) 시대 : 왕으로 부터 귀족으로의 권력 이양
왕을 위한 ‘바로크풍’ 문화는 사실상의 권력과 돈을 쥐고 있었던 귀족들에게 고스란히 이양 된다. 사실 위로 왕을 섬기기만 할 뿐 막강한 금권력으로 권력의 실권은 귀족들에게 있었으므로 왕을 중심으로 했던 바로크 문화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을 로코코 시대라고 한다.
귀족 중심의 로코코 문화는 건축물에 온갖 화려한 장식을 하였음은 물론 교회도 동반하여 사치의 극을 달리게 하였고, 귀족들의 초상화는 물론 귀족들을 위한 음악도 작곡 되는 등 호사스럽게 발전 하였지만, 그 화려함을 뒷받침하기 위한 세금부담 등이 중과됨으로써 화려함의 그늘에 있던 농민 등 빈곤층에 대한 수탈이 극심해 지는 문제가 발생 하였다. 그 결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남으로써 로코코 시대는 마리앙뜨와네트와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 바로크 풍인 건물이라면, 로코코 풍은 가구 등 생활용품
이 시대의 건축물이나 화려한 가구들은 흔히 바로크풍과 로코코풍으로 구분 짓기도 하는데, 사실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절대 왕정시대의 권력이 농업기술의 발전과 무역발전으로 돈을 번 귀족들에게 분산 된 것이 로코코라고 이해할 수 있다. 커다란 궁전의 본체를 이루는 것이 바로크풍이라고 한다면, 그 건물 속에 들어가는 각종 소품 ( 의자, 테이블 등의 가구를 비롯하여 화병, 접시 등 )을 구성하는 것들이 로코코풍이라고 이해한다면, 쉬울 것이다.
당시 귀족들의 생활이 어떠했는가는 그들의 교육 커리큘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당시 귀족자제들에 대한 교육은 세 가지가 중심이 되었다. 수학, 음악, 수사학이었다. 수학은 자기가 거느린 농노에게 경작할 땅을 빌려 주고 세금을 걷기 위해 꼭 필요 했다. 음악은 그 자체로서도 아름다웠지만, 신에게 통하는 언어라고 인식 되었으므로 음악을 이해하고 음악 하는 이를 지원 하는 것은 신을 위한 일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수사학은 귀족간의 사교 상에 꼭 필요한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송근석 / shark@thesignal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