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기운 속에서

완연한 봄기운이다.

두꺼운 겨울옷들은 벌써 깨끗하게 빨아져 다락처럼 만들어진 옷장 꼭대기의 작은 공간으로 옮겨졌다.

포행길에서 마주치는 곳마다 활짝 핀 유채, 가느다란 가지가지마다 노란 꽃들이 가득달린 개나리, 아직은 붉은 빛처럼 보이는 벚꽃과 어느 곳에서는 벌써 하야디하얀 벚꽃들도, 이름도 모르는 우주선처럼 생긴 아주 작고 노란 꽃, 그리고 꽃망울부터 터트리는 목련의 하얀 색깔에는 애잔한 느낌마저 든다.

산길에선 “겨울동안 이렇게 살아있었소”하고 선언하듯 가지마다 올라온 아기 손등 같은 새싹들이 걷는 길가에서 쳐다보길 바라듯 아우성이다.

그런 윤회의 세월들이 또 돌아왔다. 이런 계절의 맛을 몇 번 더 맛볼 수 있으려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작년과 같은 듯 다른 꽃들이, 같은 세상같은 다른 세상에서 돌고 돈다.

사람들 또한, 어쩔 수 없이 갖고 태어난 業, 살면서 만드는 좋은 업, 나쁜 업 등으로 또 다른 종류의 업을 만들며 生老病死의 굴레에서 맴돈다.

남방불교에서는 죽고 나서 천도재를 지내는 것보다 임종직전의 마음태도를 중요시한다. 여러 가지 업 중에서 임종 시의 업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 즉 아직 살아있을 때 임종에 직면한 사람에게 선하고 고결한 마음을 갖도록 해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업에 속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평안함과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참 목적이지 않을까?

탐욕스러움과 노여움으로 얼룩진 마음과 어리석음들이 고요해지고 잦아지는 순간들이 언젠가는 몸에 배인 習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또 오늘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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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 들판이고 알음알이(의식=마음)는 씨앗이며 갈애(=탐욕의 갈증)는 수분이다.

과거의 업에 의해 결정된 알음알이의 씨앗은 그에 적절한 세계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업이 비축한 자양분을 공급받아 그것의 잠재력에 따라 움이 트는 것이다.

-청정도론-

예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의 땅의 비유,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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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들에 핀 수선화 / 제주도에서 / 현담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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