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빨갱이 김병관이가 볼 때 지금 대한민국은 구제 불능이다.
호랑이가 토끼를 잡아먹어야 호랑이도 살고 번식력이 강한 토끼도 사는 법인데 feed back 즉 되먹임이라는 우주질서를 외면하고 호랑이의 이빨을 빼는 세상 동반자살의 길이기 때문이다.
아래 글은 2011년 고향 죽마고우를 50년 만에 만나 쓴 편지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무색하다.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서로의 말꼬리를 빌미로 발목잡고 늘어지는 행태가 반복 되고 있다. 오늘 날 대한민국이 처한 갈등의 원인과 처방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시 한 번 게재한다. – 필자 注 –
♦ 나라를 걱정하면서 친구에게 쓴 편지
언제나 그리운 고향의 친구야!
사회친구는 인생에 품고 어릴 적 벗은 가슴에 품는다고 했는데 각자 긴 시간 여행을 하고서 석양이 머무는 황혼의 시기에 다시 만나 추억을 안주삼아 너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이 참으로 좋다. 5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터라 그간의 이야기를 밤 새워 하고도 싶었는데 뭐에 그리 쫒기고 사는 신세가 되었는지 아쉬움이 커서 그간의 사정을 주절주절 늘어놓아 보려고 한다.
내가 친구의 마음을 알 것 같고 친구가 내 마음을 알 것 같아서다.
너나 내가 산골 촌놈으로서 기본 양심을 속이고 살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없는 놈이 서럽다’ 말처럼 하는 일마다 장애가 많고 늘 억울하게 당하는 것만 같아 하늘을 저주하고 땅도 원망한 적도 많았었지. 친구도 마찬가지겠지만 60평생 뒤돌아보니 참으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물에 빠진 자 건져주면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통에 인간을 증오하면서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었지. 이제 이순(耳順)의 나이에 와서야 그렇게 험난했던 가시밭길이 나의 영혼을 살찌게 한 자양분이 되었다는 사실 조금은 느끼게 한다.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느 것 하나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대장부(大丈夫)의 길인 걸 알지만 아직도 촌놈 근성과 소인배 기질이 남아있어 갈등이 많을 때가 더러 있단다.
소크라테스도 우리 인간은 저 하늘나라에서 지은 죄로 인해 이승이라는 감옥으로 유배를 왔기에 고해바다를 불평 없이 건너야한다고 했다. 30대 중반 많은 사람들의 억울한 일을 도우려다 빚을 40억이나 지고 6개월가량 도망을 다닌 적도 있었는데 그 때에 어느 도인을 만나 참으로 귀한 말씀을 듣게 되어 용기를 얻은 적도 있었다.
그때 그분이 맹자의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천장강대임어시인야(天將降大任於是人也: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하면)’ ‘필선고기심지(必先苦其心志: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노기근골(勞其筋骨: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을 주고)’, ‘아기체부(餓其體膚: 몸을 굶주리게 하고)’, ‘공핍기신행(空乏其身行: 그 생활은 빈곤에 빠뜨리고)’, ‘불란기소위(拂亂其所爲: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소이동심인성(所以 動心忍性: 그 이유는 마음을 흔들어 참을성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며)’, ‘증익기소불능(曾益其所不能: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시면서 하늘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다 이유가 있다는 말씀과 함께 가능하면 사업보다는 학문을 하라고도 하셨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인 시절이라 그런 이야기는 정말 귓전 밖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 많은 빚이 저절로 갚아지고 장차 나라에 큰일을 할 것이라는 말씀은 더더구나 믿어지지 않는 수수께끼였었다.
속 검은 건축업자들이 공무원들과 결탁하여 분양사기를 해서 160명의 영세상인들이 재산권을 포기해야하는 억울한 사정을 목도하고 34살의 젊은 혈기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뛰어든 것이 나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쇼핑센터의 3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백화점을 오픈 하려고 일가친지들의 집까지 잡히고 대출을 받았는데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아 이자조차 내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법원의 경매가 들어오는 등 피를 말리는 고통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었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우리인생인데 집착 할 것이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했지만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라 온 몸의 수분을 다 말리는 와중인 1987년 8월31일 억수 같은 비가 내려 성내동 풍납동 일대가 물바다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건물들 지하에 조그마한 공장들이 많았는데 85년 물난리에 이어 두 번째로 당하자 모두가 놀라서 물난리와는 무관한 텅텅 비어 있는 우리 상가로 이전을 희망해 왔다. 법원에서 경매가 진행 중임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100평 200평 원하는 대로 임대를 하다 보니 한 순간에 셀 수도 없는 공장이 들어오게 되어 숨통이 트였고 건축 사업 등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도인의 말씀처럼 5년 만에 40억의 부채를 청산하고 1991년에 다래 뷔페를 창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도인은 내가 만날 시에는 머리도 기르고 담배도 피우는 처사였는데 내가 만난 1987년 말에 승복을 입고 언론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역대 대통령 4분을 적중시킨 그 유명한 경북봉화의 현불사 설송 스님이었다.
수년 전 추미애 의원이 설 송 스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어 와서 그 분이 혜안이 대단한 분이라고 하자 추 의원도 한화갑 의원과 같이 친견한 얘기를 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있을 때인데 차기 대통령은 자네들 오야 붕이 될 것이니 잘 모시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크게 놀랐다고 했다. 다 믿을 것은 못되지만 운명이란 인간이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뜻이 있어야 되는 것만 같기도 하다. 내가 만났을 때는 수원의 일광사에 계실 때였다.
설 송 스님께서 녹음이 절정을 이루면 숨통이 조금 트일 것이라고 했는데 예기치 않은 폭우가 내려 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딛고 나에게는 행운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비가 일주일만 늦게 와도 상가에 단전 단수가 되어 회생불능이 되고 말았을 것인데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셈이다.
1991년 다래 뷔페도 수억의 시설비를 투자하여 수리를 완료한 후 허가를 신청했는데 구청에서 허가를 해주지 않아 3년간 무허가로 운영하면서 수도 없는 고발을 당하고 수억의 벌금과 두 번이나 구속이 되는 등 참으로 사람이 사는 세상 같지 않았었다. 3년 간의 법정투쟁과 노력으로 건축법을 바꾸기 까지 하여 허가를 득했는데 하도 기가 막혀 ‘다큐멘터리 드라마 낙타와 바늘귀’ 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당시만 해도 너무 억울하여 장차 구청장이나 시장이 되어 썩은 공무원들을 도려내겠다고 분기탱천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허가를 해주지 않은 공무원들이 오히려 감사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경찰만 봐도 겁이 덜컥 나던 촌놈이 검사들과 논쟁을 하고 막상 구치소에 들어가 보니 그 곳도 사람이 사는 동네라서 짧은 기간이라서 그런지 나올 때는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내가 감히 좌파정권 10년간 겁 없이 구국 투쟁도 못했을 것이다.
♦ 필자
김병관 : 1954生 경상남도 의령産, 서울시특별시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바람을 일으키는 나비의 날개…’가 있다. <사진 : 필자 근영 / 네이버에서 캡쳐 / 저작권침해의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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