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의 재발견 1 (陰陽)

  • 이진법과 양과 음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인간은 음식물 저장을 위해 땅굴을 파거나, 훈제를 하거나, 얼음을 채취하여 얼음 속에 보관하거나 하였으며, 심지어는 집안으로 신선한 개울물을 끌어들이는 등 적극적인 몸놀림을 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냉장고 안에 넣어두면 그 뿐이다. 그리고 물론 누군가가 만들었을 냉장고의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알바가 아니다. 심지어 냉장고가 고장이 난다고 해도 AS기사가 해결할 일이다. 이렇듯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오히려 단순하고 명쾌하다. 즉 복잡한 삶의 체계는 오히려 매우 단순하다.

냉장고의 작동원리도 복잡해 보이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컴퓨터로 제어 되는 냉장고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분법으로 작동한다. 긍정이 1이라면 부정은 2가 되고 반대로 긍정이 2라면 부정은 1이 되는 방식이다. 즉 냉장고에 전기가 공급 되는 것이 긍정1이라면 그 전기로써 부품을 순차적으로 작동시켜서 냉장고가 가동하게 하는 것이고, 전기가 끊어지는 것이 부정2라는 상황이면 냉장고가 가동을 멈추는 것이다. 여기에서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전기로 구동 되는 냉장고 부품들의 저항 값들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자들은 이마저도 일정한 저항 값을 설정해 놓아서 그 저항치를 넘거나 모자라는 전기는 없는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모듈에 맞춰서 기술자들은 각각의 상황을 설정하여 사용자의 니드에 맞춰서 냉장고가 기능하도록 설정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긍정과 부정>이라는 원리 속에서 작동하는 편리한 제품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널려져 있다. 우리는 이를 ‘이진법’이러고 부른다. ‘이진법’은 각각의 니드를 충족시키기 위한 통로만 많이 있으면 속도도 빠르고 정확하기 까지 하다. 오늘날 컴퓨터 부품에 사용되는 반도체의 원형이 지네발 모양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단하다.

‘이진법’으로 만들어진 컴퓨터월드는 인간에게 상상가능한 모든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해 주었지만, 그 대신에 오늘 날 인간은 저마다 정도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결정장애’의 문제에 당면해 있다. 자기가 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나서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성장하기도 했지만 소비자의 니드 중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배려심 많은 제조사들 덕분에 모든 상황은 버튼 하나로 통제되어 왔으며, 세분화된 시스템 아래서 인간 스스로가 결정을 하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결정장애’ 아래 있는 사람들의 특성은 그들이 헛똑똑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결정권을 타인에게 의지한다. 그들에게 모험은 부질 없는 일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창의성이나 진취성을 이야기 하는 것은 ‘우이독경’인 것이다. 오늘날 문명화된 나라들의 젊은이들보다 보다 늦게 문명화된 사회 속의 사람들이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중국과 인도의 잠재력을 더 높게 평가한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이미 수천 년 전에 1과 2의 ‘이진법’이 아닌 ‘양’과 ‘음’이라는 ‘이진법’이 이미 있어 왔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부터 중국인들은 만물을 ‘양’과 ‘음’이라는 ‘이진법’으로 구분해 왔다. 예를 들어서 태양은 ‘양’이고 달은 ‘음’이다. 불은 ‘양’이고 ‘물’은 음이다.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다. 양지 바른 곳은 ‘양’이고 그늘진 곳은 ‘음’이다. 나뭇가지 끝은 ‘양’이고 나무는 ‘음’이다. 뾰족한 것은 ‘양’이고 뭉툭한 것은 ‘음’이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상황은 일견 앞에서 언급한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진법’적 상황과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양철학의 음과 양은 다르다. 그것은 “음 중에 양이 있고 양 중에 음이 있다.”는 것이다.

여름은 양의 계절이고 겨울은 음의 계절이다. 그런데 여름이라고 모든 것이 음일 수는 없다. 여름 중에도 습한 곳을 ‘양 중 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겨울도 물론 음의 계절이지만 북극의 빙판 위에도 햇살이 좋은 곳은 ‘음 중 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이진법’은 1과 2의 ‘이진법’처럼 단순명쾌하지 아니하고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성’이라는 것은 “모든 사물이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의존적 관계를 가진 성질”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한 송이 꽃에서도 꽃잎은 양이고 꽃대는 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손가락은 양이고 손바닥은 음인 것이며, 발이 양이라면 종아리는 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가 된다.

이러한 ‘상대성’ 속에서는 각자의 존재가치가 살아있는 것이다. ‘음’이 없는 ‘양’이 있을 수 없고, ‘양’이 없는 ‘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성’ 속에서는 수리적 관계가 아니므로 ‘절대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수리적 환경에서는 긍정과 부정의 (+) (-)이므로 합과 감으로써 정형화 되고 결과는 절대성을 함축한다. 그렇지만 ‘상대적’ 환경에서는 ‘양’과 ‘음’이 존재하지만 ‘음 중 양’과 ‘음 중 양’에서 보듯이 절대성이 아닌 상호 의존 관계이며 결과도 정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결과치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상대성’ 아래서는 속도가 느리다. 접시 위의 물 위에 여러 가지 물감들을 뿌려 놓으면 아주 느린 속도로 색들이 서로 혼합하면서 다양한 형상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상대성’이라는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성’ 아래서는 모든 것이 정답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만 선택의 순간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결정에서의 의미가 부여 되므로 ‘결정장애’에 빠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원시시대에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목표한 곳이 아니면 돌아가고 우회하고 넘어가거나 했다. 그러나 컴퓨터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네비게이션을 따라 움직인다. 제3의 요소가 결정을 해 주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인간은 누구나 ‘결정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점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반만년 역사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문명화 된 현대 사회를 비난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상대성’의 논리 아래서 볼 때 현대문명의 혜택 속에서 놓치고 있는 인간 본연의 의지발현이 부족한 것이 아쉬운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단 한 번인 인생을 산다. 지금 살아가는 개인은 그 사람 하나가 아니라 그 위로 수많은 조상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향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종교도 달랐을 그 누군가들의 삶의 결과물이 자기 자신인 것이고, 그 조상들의 피가 면면히 흐르는 각자의 독립개체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접시 위의 물 속에 여러 가지 물감을 뿌려 놓은 것처럼 아주 느리게 물감이 혼합 되어 가는 중의 어는 한 순간이 바로 오늘날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생은 인류역사를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인 개체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동양철학은 현대사회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흔히 ‘느림의 미학’, ‘여백의 미학’이라는 동양철학의 ‘음’과 ‘양’ 간의 상대성 아래서 이루어지는 환자에 대한 진찰과 처방 그리고 치료방법은 서양의학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송근석 기자 / shark@goodmonday.me

댓글 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