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전등사 – 현존 하는 가장 오래 된 사찰

<사진 :전등사 대조루(對潮樓) / 누각 안에 들어 앉아 공중부양 된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전등사(傳燈寺)는 삼랑성(三郎城) 안에 자리 잡았다.  삼랑성은 단군왕검의 세 아들(三郞) 부여, 부우, 부소가 축성한 성이다.   삼국시대, 원래 삼랑성 토성 위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 날의 모습을 만들었고  조선시대에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삼랑성과 함께 전등사는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이다.

 

♦ 삼랑의 보호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절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서기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불교전래 10년도 안 되어 창건한 절이라 역사적 의미가 각별하다. 당시 절 이름 ‘진종사(眞宗寺)’는 1282년 고려 충렬왕시절에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사진 : 처마를 받치고 앉은 원숭이상>

전등사에는 특별한 볼거리가 많다. 그 중에 하나인 대웅전 지붕 네 귀퉁이에 처마를 떠받치고 있는 사진과 같은 목각상이 있다. 이것을 벌거벗은 여인인 나부상(裸婦像)이라고 하는데,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전등사의 전등(傳燈)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 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런 성스러운 사찰에 감히 도편수의 개인적인 원한을 심었다는 것은  불경하기 짝이 없는 낭설이다. 그런데도 절에서 세운 안내판에는 이런 설화가 버젓이 씌여있다.

 

♦ 전등사의 전등(傳燈)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 한다’

이 목각상은 원숭이라고 봐야 한다. 석가모니는 전생에 원숭이 500마리를 거느린 원숭이 왕이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서 착안하여 원숭이들의 석가모니에 대한 끝없는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네 마리 원숭이들이 처마를 받들어 지붕을 들고 있게 배치했다는 것이다.

 

<사진 : 금천교 / 한쪽은 복개된 반쪽자리 돌다리>

그 뿐만이 아니다. 삼랑성 남문으로 들어서면 전등사 경내가 시작 되는데, 사진에서와 같이 돌로 만든 금천교(禁川橋)는 있지만 개천은 복개되어 있다. 사람들에게는 편해졌겠지만, 원형이 훼손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금천교는 궁궐이나 능 그리고 사찰 등 신성한 장소의 정문 안에 흐르는 명당수 위에 놓여 진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마음을 씻고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천교만 살려 놓고 복개를 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이다. 이 금천교의 방향이 정문을 정면으로 하지 않고 사진에서와 같이 정문에서 오른 쪽으로 심하게 꺾여 있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절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덜렁덜렁 급한 걸음으로 올게 아니라 시나브로 꺾인 길로 천천히 마음을 다스리며 들어오라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 금천교(禁川橋)는  ‘서천동류'(逝川東流) 원상으로 회복 되어야

이 금천교가 이렇게 과도하게 꺾인 이유로써 한 가지 더 추정 할 수 있는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풍수지리설이다. 풍수에서의 길지는 좌청용,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에 ‘서천동류'(逝川東流)가 포함된다.  흘러가는 냇물이 동쪽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풍수이론이 중국에서 개발되었기에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중국지형에 적합하다. 우리나라는 동쪽 태백산백 영향으로 ‘동고서저'(東高西低)하여 찾기 어려운 지형이다. 그런데 전등사는 ‘서고동저'(西高東低)의 귀한 형국이다. 풍수이론에 따르면 이 개천이 마르면 사람이 떠나가고 황폐해 진다고 한다.

 

<사진 : 정족산 사고 올라 가는 길가의 수선화가 눈에 띈다>

전등사 경내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史庫)는 굳게 닫혀 있다. 절에 들어 온 사람들은 불교 신도인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찰이 문화재 관람료라는 명목으로 입장료로 3천원을 받는다면, 정족산 사고는 마땅히 열려져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절을 찾아 들어서는 차량들에 대해서는 2천원의 주차료를 꼬박꼬박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등사를 돌아보면, 이 절의 재정이 너무 풍부해  적은 것은  방치되는 모습이 보인다. 대웅전 맞은 편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던 시절에 있었다는 임시 궁궐터인 가궐터로 가는 길 옆 은행나무밑에는 지난 가을  은행 알이 수북하게 널브러져 있다.  보통의 절집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다.

 

♦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움

정족산 사고에는 아쉽게 들어갈 수 없었지만, 사고까지 올라간 보람은 있다. 사고 정문에서 내려다 보는 경관이 노송과 함께 경이롭다. 사고 들어가는 오른편 길목에 소담한 수선화는 그 아름다움이 꽃말처럼 고결하고 신비롭다.

 

<사진 : 정족산 사고 담장에 기대서 내려다 본 풍경 >

전등사 관리가 디테일 면에서 다소 부족한 면이 있지만, 신도들의 노력으로 감탄사가 나오는 아름다움이 곳곳에 숨어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볼수 있는 대웅전 부처님 좌대를 장식한 목각의 아름다움은 보물급이다.  신도들의 친교장소이며 차향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다원’의 생화 꽃꽂이는 소소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눈과 마음이 절로 호사하게 한다. 전등사가 주말 가족나들이 장소가 된 이유가 서울에서 가까운 때문만이 아닌 것이다.

 

<사진  : 대웅전 부처님 좌대 목각>

 

<사진  : 다원 앞 찻상 꽃꽂이>

 

전등사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 한다’는 절 이름을 살리지 않는다면 단순한 경승지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 불교 신도인 필자는 여러 절을 다녀 봤지만, 절집마다 느끼는 의미가  다르다.  분명한 것은 도량 깊은 절집은 검박한 절제에서 공경을 받는 법이라는 것이다.

♦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배려심의 온기가 가득한  卍

두고 온 은행알이 아까워 한마디만 더한다. 필자 이웃의 세검정 소림사 주지스님은 가을이면 새벽마다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을 주워 담는다. 간혹 절에 들어서는  신도들이 도우려 하면  “맨 손으로 만지다가 옻오르면 고생한다”라며 한사코 말린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배려심의 온기를 느끼게 된다.

2 댓글

  1. 사찰이나 특정한 장소를 기사화할 때는 관점을 정돈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관광을 위한 것이라면 당장 이번 주말에 자동차 시동을 걸고 그쪽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도록
    조금 더 흥미를 유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가는 길에 대한 안내 또는 주변에 함께 할 구경거리, 먹거리는
    어떤 것이 있는지 알려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인터넷만 뒤지면 나오는 역사적인 가십은 크게 흥미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내고장 명소등을 흥미롭게 보고 있는데 하루속히 기사의 색깔을 찾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전부 다를 아우르려는 욕심때문에 완전히 주마간산된 느낌이 항상 안타깝습니다.

    • 님의 지적에 감사합니다. 더 나은 기사를 위해 노력하갰습니다. 말씀 하신 중에 “인터넷만 뒤지면 나오는” 부분은 뼈 아픈 지적입니다. 다만 전등사 기사 중에 “금천교” 관련 된 내용은 아무데서도 찾아 보실 수 없음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거듭 감사드리며, 기사 중 “금천교(禁川橋)는 ‘서천동류'(逝川東流) 원상으로 회복 되어야” 전 후 부분을 다시 한 번 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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