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예 미8군사령관’ 백선엽 대장 – 자유에는 공짜가 없다.
故 배선엽장군은 미군이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불러왔던 주한 미군은 2013년부터 백장군을 ‘명예 미8군사령관’으로 위촉해 주한 미8군사령관과 같은 예우를 해왔다.
미군이 백장군을 영웅으로 인정한 계기는 다부동 전투에서의 ‘사단장 권총 돌격’ 사건이다. 다부동 전투는 美 27연대(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와 한국군 1사단과의 최초로 전개한 연합작전이었다. 미군이 두 달 전 참전했지만 급격한 전황으로 합동작전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군대 편제로 보면 마땅히 美 27연대가 백선엽의 1사단에 배속되거나 작전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군을 믿지 못하는 미군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잔뼈가 굵은 미군 장교들이 볼 때, 당시 별 하나인 백장군은 동안인데다가 실제로 3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때문에 백장군의 ‘사단장 권총 돌격’은 그때까지 “과연 한국군이 스스로 자기 땅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가?”라는 미군들의 의문에 명쾌한 답을 주었던 것이다.
당시 그 광경을 지켜 본 美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백장군에게 “미안하다”며 개인적인 사과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군 내에 백장군의 영웅담을 퍼뜨렸다.
이 후 미군은 백장군에 대한 무한 신뢰로 그가 작전을 펼치는 전투지역에는 미군이 포병과 항공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백장군이 8군단장으로 동해안에서 전투를 할 때도 美군함의 함포지원을 받아 전선을 위로 끌어 올려 오늘 날의 지도를 만들었다.
아래는 백장군의 자서전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 인용한 ‘다부동 전투’ 부분이다. 글을 보면 ‘자유에는 공짜가 없다”던 故 백선엽 장군이 남긴 교훈과 미군은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는다’는 신뢰의 중요성이 새롭게 느껴진다. 장군의 명복을 빈다.
♦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
1950년 8월 21일 아침, 반격을 시작하기로 돼 있었는데 적이 먼저 공격을 해 왔다. 그때 11연대 1대대 병력이 벌써 적군에게 쫓겨 후퇴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11연대와 인접해 있던 미 27연대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미 8군사령부에 “한국군이 후퇴해 퇴로가 차단당하게 됐다. 늦기 전에 우리도 철수하겠다”고 보고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잠시 후 미 8군사령부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 왔다. “도대체 한국군은 싸울 의지가 있는 군대냐”는 질책에 나는 크게 당황했다. 나는 즉시 지프를 몰고 11연대 전방으로 나갔다. 보고는 사실이었다. 11연대 병사들은 축 처진 모습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나는 김재명 1대대장을 불러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대대장인 그도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병사들이 밤낮없이 계속되는 전투에 지쳤습니다. 거기다 보급이 끊겨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못 먹었습니다.” 지치고 허기진 병사들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모두들 앉아라.” 아무리 다급해도 병사들의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내 말 잘 들어라.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도 후퇴할 곳이 없다. 물러서면 바다뿐이다. 후퇴하면 나라가 망한다. 우리와 같이 싸우는 미군들은 우리를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먼저 후퇴하다니, 이 무슨 꼴인가? 대한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앞장서겠으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거든 나를 쏘아라!”
나는 권총을 세워 들며 돌격명령을 내리고 장병들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우렁차게 함성을 지르며 내 뒤를 따랐다. 한번 기세가 오른 병사들은 거짓말처럼 용감했다. 어렵지 않게 고지를 탈환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마이켈리스 대령은 나중에 내게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사단장이 직접 앞장서는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