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에 역행 했던 바티칸, 변화를 위한 대화
‘두 교황’은 인생의 참맛이 용서와 관용에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2013년 교황에서 스스로 물러난 베네딕토 16세와 그 뒤를 이어 취임한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실화가 바탕이다.
2005년 4월 제264대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후 신임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열린다. 콘클라베에서 독일 출신의 라칭거 추기경이 아르헨티나 출신인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누르고 교황에 오른다. 그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다.
그의 취임 후 바티칸은 시대에 역행하면서 보수화한다. 한편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바티칸에 수차례 사직서를 내지만 교황의 허가를 받지 못한다. 베네딕토 16세로서는 사임을 받아 줄 경우 정적 제거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바티칸이 스캔들로 몸살을 앓던 2012년 베네딕토 16세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바티칸으로 불러들여 대화를 한다.
♦ 각기 금수저와 흑수저 출신으로 서로 겉 돌던 두 교황
태생부터 금수저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흑수저 출신인 베르고글리오 추기경 두 사람의 대화가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물과 기름처럼 겉 돈다. 더구나 대화 주제는 카톨릭 교회의 태생적 화두인 ‘변화와 타협’이다.
교황의 여름별장에서 시작된 대화는 다음 날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다시 그 옆 작은 방에서 배달 된 길거리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어진다.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 온 두 사람의 대화는 쉽지 않다. 그러나 관용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시간이 갈수록 우정이 깊어진다. 대화 끝에 베네딕토 16세는 카톨릭에 변화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후임으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적임 임을 확신하고 퇴임을 결심한다. 이 대화 장면에서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영혼이 정화됨을 느낀다.
영화가 준 감동의 여운 때문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도 관객들은 자리에서 쉽사리 일어 날 줄을 모른다. 그런 관객들을 위해 감독은 엔딩 크레딧 속에 천둥과 세찬 빗줄기 소리로 시원하게 가슴을 씻어 준다. 이윽고 소나기가 그치고 나면, 새들의 노래 소리로 해방감을 선사한다.
♦ ‘남 탓’ 없는 진솔한 대화로 ‘변화와 타협’의 한 해가 돼야
‘남 탓’이 난무하며 불신과 대립으로 점철된 한 해가 저문다. ‘남 탓’은 분명 ‘내 탓’보다 살아가기에 편리한 방편이다. 자신은 잘 못 한 게 없는 선량한 피해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양심에 찔릴 일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 심지어 설사 잘 못 된 게 있더라도 ‘내 탓’이 아니라 법과 제도라는 ‘남 탓’이 방패가 된다.
반면에 ‘내 탓’은 힘이 든다. 자신의 잘 못을 인정하고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용광로 속의 쇠처럼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내 탓’은 변화를 통해 발전 할 수 있지만, ‘남 탓’은 변화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무는 수 밖에 없다. 잘 못한 게 없는데 변화한다면, 자기 모순 속에 빠지기 때문이다. 결국 ‘남 탓’의 결말은 퇴행일 뿐이다.
庚子년 새해에는 우리 사회가 거짓과 ‘남 탓’ 없는 진솔한 대화 속에 ‘변화와 타협’ 이 이루어지기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