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고 하였다. 서양의 칸트도 인간의 존엄한 가치는 도덕적인 이성의 주체로서 행동 할 때 비로소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가 국가경영의 패러다임으로 삼았던 주(周)나라 통치규범은 사회지배계층은 예(禮)로써 일반 백성들은 형(刑)으로 다스리는 것이었다. 이런 법철학이 주(周)나라 이후 사법(司法)의 원칙으로 간주되어 온 이유가 무엇일까.
刑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禮는 사회근간을 구성하는 인간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인간관계는 씨줄 날줄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禮를 경시하다가는 언제 어디서 뒤퉁수를 맞을지 모른다. 오래전 학폭이나 잊혀진듯하던 성폭이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禮의 근간은 부끄러움(恥)에 있다. 치(恥)는 남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게 두려워 극단적 선택을 하게도 할 정도로 인간에게 큰 문제다. 禮는 상대방에게 수치심(恥)을 주지 않고, 나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는 신사도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는 지속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우리 사회가 ‘쥴리’라는 벽화에 여야 지지층이 결집하는 모양새다. 다행인 것은 여야지도층이 한 목소리로 “인격 침해와 사회적 폭력”이라며 비판한 것이다. 그나마 우리사회에 아직은 禮가 남아있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이럴 때는 보고듣지 않는 게 상책이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꼴불견이라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은 이럴 때 쓴다. 우연치 않게 70년대 맹인가수 이용복의 히트곡 쥴리아가 연상되는 이유도 目不忍見 덕이다. 아름다운 노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이용복씨의 근황이 궁금하다.
매주말 연재되는 『팝으로 보는 세상』에서 우리 가요를 올리는 건 처음이다. 가뜩이나 짜증나는 분위기라 원곡보다 유튜브에서 라인댄스 동영상을 찾았다. 우리네 이웃 아줌마들의 건강하고 발랄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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